원효사 성보문화재 기도법회 오시는길 알려드립니다


개산조당에는 원효사의 창건주로 숭상되는 원효성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효성사의 진영은 세가지 형태로 모셔졌는데, 각각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르게 조성되어져 있습니다

현재의 개산조당 건물은 1990년 5월에 건축되었으며, 이 전각 내에는 1710년 추월산 만수사에서 조성되어졌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곳 원효사에 소장되고 있는 시지정 유형문화재 15호인 만수사 범종이 있습니다.





개산조사당의 양 측면과 뒷 벽면에는 원효성사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을 벽화로 그려놓고 있습니다.



개산조당 내 원효성사 진영 

해동화엄초조 원효대사진영(海東華嚴初祖元曉大師之眞影)’이라 쓰여 있습니다.

 

 


제1. 수하탄생상(樹下誕生相)

불지촌 사라수 나무아래에서 태어난 모습.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에 원효성사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은 설()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으로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내(談㮈) 내말(乃末)이다.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불지(佛地)로 또는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속어로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 한다.]

사라수에 관해서는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성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고 창황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누워 있었으므로 [] 나무를 사라수라고 하였다. 그 나무의 열매도 보통 나무와는 달랐으므로 지금도 사라밤[裟羅栗]이라고 한다.

예부터 전하기를, [사라사의] 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의 끼니로 밤 두 개씩을 주었다. 종은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가 []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보았더니 한 개가 바루 하나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이름을 율곡이라고 하였다.

성사가 나서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은 속어로 털이다.]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년(丁丑歲)이었다.


 



2. 출가수학상(出家修學相)

출가하여 수행 공부하는 모습.

 

원효성사의 출가와 스승에 대해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고 있으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 그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始末)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크나큰 업적은 당전(唐傳)과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성사는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이름을 초개(初開)라고 하고,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지어 사라(裟羅)라고 하였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佛地)라고 하고, 절 이름을 초개(初開)라고 하며,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대개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初輝佛日)는 뜻이다. 원효도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으로 그를 첫새벽이라고 불렀다.




3. 심앙문법상(尋仰聞法相)

널리 스승을 찾아 깊이 법을 구하여 듣는 모습.

원효성사는 따로 정해진 스승이 없이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널리 스승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하셨습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소(華嚴疏)를 짓다가 제4 십회향(十廻向) 품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소송을 인해서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었으므로 모두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라고 하였다.

또 해룡(海龍)의 권유에 따라 길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이라고 했는데, 또한 본각과 시각 두 각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大安)[언제나 저자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바라를 치면서 大安 大安하고 소리치며 노래했으므로 이같은 가 붙었다.]법사가 배열하여 종이를 붙인 것임을 알고 화창한 것이다.



4. 석굴수도상(石屈修道相)

석굴에서 수행하는 모습.

 

원효성사는 석굴에서도 많이 수행하셨습니다. 성사는 34세 때 당나라로 가다가 붙잡혀 귀환한 뒤 다시 유학하러 떠나던 44세 사이의 상당 기간을 팔공산에서 수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굴사 석굴에서 수도한 뒤 오도굴에서 득도했다"는 것이 골간이며, 불굴사 석굴은 원효의 고향인 경산과 가깝습니다. 이외에도 원효성사와 관련된 토굴은 다수 전해오고 있습니다.





5. 고총오도상(古塚悟道相)

오래된 무덤에서 이치를 깨우치는 모습.

 

성사께서는 출가한 후진덕왕(眞德王) 4(650) 의상(義湘)과 더불어 당으로 유학코자 길을 떠났는데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병에게 잡혀 신라의 첩자로 의심을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간신히 풀려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초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들이 이번에는 바다로 건너가기로 하여 문무왕(文武王) 1(661) 서해안 항구에서 배편을 기다리던 어느 날, 어둠 속에서 찾은 잠자리가 다음날 깨어보니 헐어빠진 낡은 무덤의 한 귀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갈증에서 달게 목을 축인 바가지의 물이 바로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습니다

이에 성사는 문득 '모든 것은 오직 내 마음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읊으신 게송이 있는데, 아래의 우리말 번역은 송광사 유나이신 현묵스님께서 하신 현대판 번역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니 

모든 것이 생겨나고(心生则種種法生 심생즉종종법생)

마음이 쉬어지니

지옥 천당 둘이 나오네(心減则觸麵不二 심멸즉감분불이)


이세상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니(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만법유식)

마음밖에 따로

무엇을 구하리오(心外無法胡用別求 심외무법호용별구)


이리하여 마음과 나를 발견한 성사께서는 유학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미련없이 홀로 되돌아와 이후 국내에서 꾸준히 혼자서 공부하셨습니다.





6. 가두만행상(街頭萬行相)

거리에서 무애무를 추며 교화하는 모습.

 

한편 성사께서는 거리에서 무애무를 추며 만행을 하시기도 했는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성사가 이미 실계(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문귀에서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원효는 무애가를 통해 부처의 가르침이 중생에게 쉽게 전달되도록 하였다. 또한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하였다. 원효는 직접 대중에게 불교를 포교하며 극락에 가고자 하는 미타(彌陀) 신앙을 전개하면서 신라 불교의 새로운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7. 요석춘연상(瑤石春緣相)

요석궁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난 모습.

 

원효성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는 일찍이 널리 전해져 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에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일찍이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 뜻을 알지 못했는데, 이때 태종(太宗)이 그것을 듣고서 말하기를,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瑤石宮)[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곳이다.]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다.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서 [궁중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그를 찾으려고 하는데, 벌써 [그는]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사천(沙川)이나, 세간에서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 하고,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고 한다.]를 지나고 있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니, 이 때문에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8. 군기참모상(軍機參謀相)

군사 참모로 자문하는 모습.

 

성사께서는 암호를 풀어 많은 군사를 살리신 적도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만약 총장 무진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아래 글에 보이는 소정방은 오류이다. 만약 정방이라면 연호가 마땅히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니 [고구려에] 와서 평양을 포위한 때이다][신라]나라 사람들이 청병을 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 달라.” 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까지 이르기는 그 형세가 위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다하여 요청하는데 군량을 보내지 않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김유신이 나와 아뢰기를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있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전해 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하고자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와 병천(兵川) 등 두 사람을 보내 합세할 기일을 묻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난새[]와 송아지[] 두 가지 물건을 그려 돌려 보내었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청해 묻자, [법사가] 이를 해석하여 속히 병사를 돌이켜라. 송아지와 난새를 각각 그린 것은 두개로 끊어짐을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강(浿江)을 건너려 할 적에 오늘 뒤에 쳐져서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 하였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절반 정도 건넜을 즈음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다음날 유신이 거꾸로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하였다.





9. 강경경치병상(講經綆治病相)

금강삼매경을 설하여 왕비의 병을 치유하는 모습.

 

중국 <송고승전>의 원효 전기에는 성사께서 금강삼매경을 설하여 왕비의 병을 치유하셨다고 전합니다. 즉 다음과 같이 <금강삼매경>의 발견 및 그 경전과 원효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비가 병이 났는데 백방으로 애써도 고치지 못하여 다른 나라로 약을 구하러 뱃길로 사신을 보냈더니 가는 도중에 용궁에 가서 용왕을 만났다. 용왕은 용궁에 보관되어 있던 흐트러진 <금강삼매경>을 주면서 왕비의 병을 인연으로 이 경전을 널리 퍼뜨리도록 하라고 하면서, 대안 성자에게 순서를 맞추도록 하고 원효 법사에게 주석서를 써서 강의하도록 한다면 왕비의 병은 반드시 낫는다 하였다. 대안이 경전의 순서를 맞추고 원효가 소의 수레 위에서 주석서 5권을 지었으나 도적을 맞아서 다시 3권으로 주석서를 써서 강의를 하였다. 3권짜리 주석서가 중국에 수입되었는데 나중에 경전 번역하는 삼장법사가 논으로 삼았다.”

 




10. 쇄수진화상(灑水鎭火相)

물을 뿌려 불을 끄는 모습.

 

원효성사께서는 여러 이적도 행하셨는데, 찬영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당나라 성선사(聖善寺)에 화재가 난 것을 신라 고선사(高仙寺)에 있던 성사께서 아시고 서쪽을 향해 물을 뿜어 불을 껐다고 합니다. 

고선사에 원효가 거처하던 방 앞에 있는 작은 연못이 그때 물을 대었던 못이라고 전합니다.





11. 척반구중상(擲盤求衆相)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는 모습.

 

또하나의 이적으로는 찬영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당나라의 한 사찰[운제사(雲際寺), 태화사(太和寺), 담운사(淡雲寺) 등이 서로 그 절이라고 주장]에 불사가 열려 1000명의 대중이 운집, 곧 절이 무너져 압사할 위기에 놓여 있음을 원효가 천안통(天眼通)으로 알아 차 소반을 던져 이상히 여긴 대중들이 차 소반을 따라 밖으로 나온 순간 절이 무너져 죽음을 면했다고 합니다. 이때 원효의 도움으로 살아난 천명 대중은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12. 분황찬소상(芬皇撰疏相)

분황사에서 저술하는 모습.


성사께서는 대중 교화에 진력하는 한편으로 저술에도 힘을 써 불교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노력하셨습니다. 그는 현재 전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무려 100여 부 240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 가운데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그의 독창적인 논리를 담은 저술로, 중국의 고승들이 인도의 마명(馬鳴)용수(龍樹)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역시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고 하여 즐겨 인용하였습니다.

 원효는 이렇듯 다양한 경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화쟁 사상을 제시하였습니다. 곧 어느 한 경론(經論)에 치우치지 않고 많은 경론을 두루 연구하여 여러 경론이 모순 대립하는 것같이 보이는 점들을 융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대승불교의 중심인 중관학파(中觀學派)와 유식학파(唯識學派) 사이의 교리적 대립인 공()()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융합적인 교학을 성립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공()이다는 중관과 세상의 모든 현상은 다 식()이다라는 유식을 비판하면서 세상은 오직 한마음[一心]이다라고 주창하셨습니다.

원효는 신라 교학의 토대 위에서 당대의 사상적 과제이던 중관과 유식을 융합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파 의식을 극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 불교를 근원적인 입장에서 종합 정리하여 불교 이해의 기준을 확립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이후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거나 전쟁으로 처참해진 백성의 삶을 위로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13. 혈사입적상(穴寺入寂相)

혈사에서 입적하는 모습.


말년의 원효는 이 세상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고요히 앉아 촛불이 꺼져가듯이 686년 음력 330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평화롭게 입적하셨습니다. 이 혈사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4. 소상회고상(塑像回顧相)

설총이 인사하자 소상이 돌아보는 모습.


성사의 사후에도 이적이 있었는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성사께서]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그의]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사모하여 지극한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설총이 그때 옆에서 예배를 하니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찬하여 말한다.

각승(角乘)은 비로소 삼매경을 열고

표주박 가지고 춤추며 온갖 거리 교화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 깊더니

문닫힌 분황사엔 돌아보는 모습만 허허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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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등산 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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